지금 우리는 역사적 대전환기에 살고 있습니다. 나라 안팎으로 격동의 파도가 몰아치고 있는 형국입니다. 나라 밖을 살펴보면, 한반도를 둘러 싼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는 한 마디로 “불안한 3중주”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갈등과 긴장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미국이 지속적인 경제침체와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서의 장기 전쟁의 여파로 국방비를 대폭 삭감한 결과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대한 군사태세가 예전만 같지 못한 반면, 중국은 미국과 ‘세계 2대강국’의 지위를 넘볼 만큼 급격히 부상하고 있으며, 우경화의 길을 걷고 있는 일본은 이 틈을 타고 이 지역에서 미국의 역할을 상당부분 대신한다는 명분하에 주변국들과 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북한은 시대착오적인 왕조세습체제의 지탱과 적화통일의 미몽을 포기하지 못한 채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파괴무기와 비대칭군비 강화에 매진하느라고, 주민들을 폐쇄와 극심한 인권유린, 그리고 참담한 경제적 궁핍의 나락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개혁·개방을 완강히 거부한 채 “삭아가고” 있는 북한이 역으로 이처럼 강력한 군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은 마치 화약고를 머리에 이고 사는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한편, 나라 안을 돌아보면 우리사회는 지금 다양한 ‘양극화’ 진통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내년이면 국토분단 70주년이 되지만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통일에 대한 열망은 식어가고 있으며, 세월호 사고를 포함한 여러 사건·사고들이 드러내고 있듯이 원리와 원칙이 경시된 채 급속성장에만 매달려 온 반세기의 근대화 과정은 국내외의 찬사와 빛나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찬란한 외형만큼이나 내실의 빈 구멍이 뼈아프게 느껴지는 게 현실이기도 합니다. 계층 간에, 세대 간에, 지역 간에, 그리고 각종의 이해집단 간에 첨예한 갈등과 대립이 난무하는 가운데 더욱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이를 조정하고 쓰다듬어서 국민통합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회적 어른’의 부재와, 특히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정치권이 정당·정파·계파 다툼에 몰두하느라 오히려 이러한 갈등들을 더욱 부채질한다는 사실입니다.
눈앞의 이해관계에만 사로잡혀 발치너머 큰 그림을 볼 줄도 모르고, 그저 할딱대는 잔 호흡에 매달리느라 보다 긴 호흡을 아예 잊어버리고 사는 게 아닐지 스스로도 모골이 송연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흔히 ‘문사철(文史哲)’로 일컬어지는 인문학이 인간의 기본적인 문제들을 다루어 인간들 사이의 여러 난제들에 대한 해결책의 한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 “나(인간)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이것들이 인문학에서 다루는 기본명제들입니다. 과연 이런 명제들에 대한 성찰이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줄 수 있을까요? 저는 역사학도의 한 사람으로서, 역사가 문학이나 철학처럼 ‘역사적 대전환기’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한 줌의 소금이 될 수 있다는 소망을 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감히 13년 전 여름에 어떤 신문에 이미 실었던 칼럼 하나를 들춰내어 먼지를 털고 약간 가필하여 아래의 글을 올립니다. 그저 편한 마음으로 읽어보아 주십시오.
프랑스의 위대한 역사학자로서 역사철학(Historiography)의 한 학풍인 ‘아날(Annales)’학파 창시자의 한 사람인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의 마지막 저작으로 ⌜역사를 위한 변명⌟이 있다. 이 책은 “역사란 도대체 무엇에 소용이 있는가?”라는 보편적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쓰여 졌다.
블로크는 제2차 세계대전 개전과 동시에 프랑스가 독일의 전격전에 의해 순식간에 패배한 직후, 대다수 프랑스인들이 ‘역사의 교훈’에 대해서 회의를 품게 되었을 때 이 책의 저술에 착수했다. 이 책은 그의 직전 저작 ⌜이상한 패배⌟에서 다룬 패전의 분석 외에, 보다 근본적인 질문인 ‘역사와 역사가의 미래’에 대한 스스로의 답변을 담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리자였던 프랑스에게 도대체 무슨 역사적 오류가 있었기에, 불과 20년 후에 같은 상대에게 그토록 처참한 패배를 속절없이 당했는지에 대해서 그 역시 다른 프랑스인들과 마찬가지로 깊은 좌절과 회의를 느꼈던 것이다.
유태인이었던 그의 신변을 걱정한 미국정부와 학계의 주선에 따라 미국으로 이주하여 학문과 인생의 결실기를 누릴 수도 있었던 블로크는, 그러나 아내와 6명의 자식을 둔 5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치에 항거하는 레지스탕스 대열에 합류했다. 그리고는 이윽고 너무나도 저명했던 이 학자는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국적의 비시 정부 친독의용대의 밀고에 의해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죽음을 예견하고 미리 써두었던 유언장에 “내 묘비에는 ‘그는 진리를 사랑했노라’는 한 마디만 적어 달라”고 했을 만큼 ‘행동하는 지성’이었던 블로크가 평생의 ‘직업’이었던 역사가의 사명을 걸고 역사의 변명에 나섰던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는 주장한다. 사람들이 역사를 잘못 이해한 것이지 역사가 사람들을 배반한 것은 아니라고.
역사는 과연 무엇이며 그 역할은 어떠한 것인가? 역사의 사(史)는 손(手)으로 중심(中)을 잡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한문 글자를 설명하는 ⌜설문해자(說文解字)⌟라는 책에 나오는 해석이다. “손으로 중심을 잡는다”라는 말은 손으로 글을 써서 세상을 올바르게 바로 잡는다는 뜻이리라. 역사라는 의미의 영어 ‘history’도 ‘고급 이야기’(hi-story)라고 풀이될 수 있는데, 이 또한 역사가 세상에 경종을 울려주는 ‘높은 수준의 이야기’라는 뜻일 게다.
인간은 ‘기록하는 동물’이다. 알타미라 동굴의 선사시대 벽화도 그것이 그림이기 이전에 전달하고 싶었던 내용을 기록으로 남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인간이 기록을 한다는 것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시간개념’ 때문이다. 작가 이문열 선생은 역사란 어찌 보면 ‘집단의 추억’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추억이라는 단어에는 ‘과거’라는 시간개념이 담겨 있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과거라는 시간개념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역사이다. 그래서 역사학은 ‘변화의 과학’이다.
이왕 ‘과학’이라는 말이 나온 참에 한 마디 덧붙이자면, 역사학은 ‘과학’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실증과학’이다. 역사학이야말로 증거에 입각하고 근거에 의해서 기록하는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학문이다. 근거에 입각하지 않거나, 인간사의 어느 한 부분을 부풀려서 그것이 마치 사실인 양, 또는 전체의 모습인 것처럼 기록한다면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픽션’의 영역에 속하는 주장일 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좌경화 ‘작가’들이 역사입네 하고 써서 우리 청소년들을 오염시키고 있는 우리 현대사 교과서들이다. 그들은 전 세계가 찬탄하고 모방하고자 하는 대한민국 근대화의 역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부끄러운 역사이며, 심지어는 대한민국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고 교실에서 가르치기도 한다. 북한의 6·25남침으로 잿더미가 되어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였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도약하고, 수출액이 반세기 만에 2만 배로 폭증하여 마침내 내년에는 인구 5천만 명 이상으로 개인당 GNP가 3만 달러를 넘는 국가들인 ‘30-50 클럽’에 세계 7번째로 가담하게 된 우리 현대사가 어찌하여 독재와 부정부패와 불의의 대명사가 될 수 있는가? 물론 근대화의 과정에서 찬란한 빛의 한켠에 소외와 부조리의 그늘도 있었다. 인류의 역사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로 대변되는 근대화의 과정을 보면, 선진국들도 모두 80년에서 200년 가까운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투쟁과 시행착오를 겪었으며, 노사갈등과 사회정의의 문제들도 공통적으로 겪었다. 실로 인류 역사발전의 과정에 ‘건너뛰기’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화 선발국가 가운데 어떤 나라도 자국의 근대화 역사를 우리 현대사처럼 왜곡하고 폄훼하는 예는 없다. 역사는 ‘실증과학’이므로 결코 ‘픽션’ 쓰듯이 할 수 없으며, 쌀 한 가마니에 모래가 한 줌 들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쌀가마니’가 아니라 ‘모래가마니’라는 주장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학은 ‘인간주의 학문’이다. 역사학자 로빈 콜링우드(Robin Collingwood)가 역사를 “인간이 무엇을 했는가 말함으로써, 인간이 무엇인가를, 인간에게 말하기 위해 존재 한다”라고 역설한 점이 이를 잘 나타낸다. 역사의 주제는 인간이라는 뜻일 게다.
역사는 이처럼 과거의 사실을 기술하는 것이지만, 결코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는 현재를 되 밝히고 미래를 지향한다. 현재와 미래에 요긴한 쓸모가 없다면 역사란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인류의 오늘은 수많은 과거들이 축적된 결과물이며, 따라서 현재는 과거의 끈으로부터 이어져 있고, 그 끈은 당연히 미래로 연결된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아(E. H. Carr)가 역사를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 것은 과거가 ‘지나간 것’으로서가 아니라 현재의 의미를 지니고 오늘의 모습으로 기록됨을 말 한 것이다.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오늘 우리가 어제를 보는 것처럼, 내일 후세는 오늘을 볼 것이다. 역사라는 ‘거울’을 통해서이다. 이 거울이 밝은 거울이기 위해서는 진실된 기록이어야 한다. 잘 한 것은 잘 한 대로, 잘못한 것은 잘못한 대로 어김없이 기록해야 한다. 그래야 잘 한 것에 대한 자부심과 잘못한 것에 대한 겸허하고 건전한 자기반성을 통해 미래의 발전을 위한 창조적 활력이 생성된다.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강제수용소 입구에는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마련이다”라는 경구가 달려 있다. 그 수용소에 가서 참회의 눈물을 흘린 독일 지도자들과, 야스쿠니 신사에 전범자들을 ‘모셔놓고’ 거기 가서 참배하는 일본 지도자들의 모습은 얼마나 대조적인가! 대쪽 같은 사필(史筆)의 도(道)를 일컬어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 하거니와, 과연 어느 쪽에 진리의 길이 있으며, 어느 편에 밝은 미래가 열려 있으리라 생각되는가?
이처럼 진실에 바탕을 둔 역사의 진정한 쓸모는 무엇일까? 역사의 쓸모가 어디 한두 가지일까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의식’이 아닐까 한다. 여기서 의식이라 함은 ‘두려움을 아는 것’이라 풀어 본다. 결국 역사를 두려워하는 것이 역사의식이다.
오늘 내가 하는 일과 오늘의 내 모습을 역사가 어떻게 기록할 것이고 후세가 어떻게 평가할는지 ‘의식’한다면, 정치가도, 관료도, 경제인도, 심지어 범부(凡夫) 조차도 한 번 더 옷깃을 여미지 않겠는가. 그리 되면 오늘의 우리 사회, 내일의 우리나라가 그만큼 더 나은 모습이 되지 않겠는가. 역사는 이것만으로도 그 존재 가치가 빛난다. 이게 필자 나름의 역사를 위한 변명이다. 역사를 두려워하자.
-⌜시와 소금⌟ (2014 겨울, 통권 12호) 권두칼럼 “소금의 말”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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